신데렐라는 왕자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 #136

......#136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

잔디는 냉장고에서 꺼낸 캔맥주를 따며 한숨처럼 말했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까지 될 수가 있니? 누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난 정말 이해가 안 가."
"야, 그만 꺼내라. 벌써 몇 개째야? 낮술은 정도껏 해야지."

만류에 아랑곳않고 단숨에 비운 맥주캔 세 개째를 탁자 위에 올려놓는 그녀를 보고 혁진은 혀를 찼다.

"이제 그만해. 한 개만 더 꺼내면 내가 내려가서 뺏는다."
"흥, 그 다리로 내려오기 전에 내 두 개는 더 해치울 수 있다."
"너야말로 그러다 다리 풀려서 올라오지도 못할라고. 내가 업어다 올릴 수도 없는데."
"다리가 풀리긴, 맥주가 무슨 술이냐? 이까짓 거 한 다스 비워도 간엔 기별도 안 가지. 그냥 속이 답답해서 마시는 거야."

잔디의 원룸은 복층형으로 아래층엔 주방, 책상, 화장실이 있고 위층엔 침대와 TV가 갖춰져 있는 구조였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거의 사다리라 해야 할 만큼 좁고 가팔라서 발등뼈 골절로 아직도 목발을 짚고 다니는 혁진이 오르내리기엔 꽤 힘들었다. 그래도 거기 오면 혁진은 늘상 위층 침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앉기만 해도 천장이 머리에 닿을락말락한 아늑한 공간감에 난간 너머로 방 전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그 자리를 그는 너무나 좋아했다. 좁고 높은 델 좋아하는 게 아직도 꼭 어린애라고 잔디는 비웃었지만, 워낙 면적이 작은 집이라 덩치 큰 그와 함께 있으면 뭘 해도 걸리적거리기 때문에 위층에 처박아두는 게 그녀로서도 편했다. 오늘처럼 술을 멋대로 꺼내 먹고 싶을 땐 특히나.
그러나 냉장고에 넣어둔 맥주가 동났기 때문에 일단 거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잔디는 입 속으로 투덜거리며 찬장에서 캔 두 개를 꺼내 냉동실에 집어넣었다. 혁진은 난간에 턱을 대고 그걸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디서 그렇게 끝도 없이 나오냐? 아주 박스로 사다 놓고 마시냐?"
"당연하지. 대량 구매하면 얼마나 더 싼데."
"그러다 알콜 중독 걸리겠다. 혼자 살면서 말릴 사람도 없이."
"걱정 마. 난 혼자 마시는 거 즐기는 사람 아니니까. 주정 받아줄 사람도 없이 술을 무슨 재미로 먹냐?"
"내가 여기 오질 말아야 되겠구나."
"그럼 나가서 마시지."
"난 니가 주정 아니라 맨정신으로 뭔 소릴 해도 받아줄 사람인데, 술은 그만 먹고 얘기하면 안 돼?"
"수험생은 공부하셔야죠. 이제 진짜 딱 한 달인데."
"딱 한 달만에 수능 점수가 얼마나 달라지겠어? 니가 그러고 계속 있어도 나 공부 안 되긴 마찬가지야. 그러지 말고 올라와라. 응?"

잔디가 계단을 올라오자 혁진은 엎드려 풀고 있던 자습서를 덮고 일어나 앉았으나 그녀는 침대에 철퍼덕 엎어져 한동안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혁진은 그런 그녀의 뒷머리를 토닥토닥 해주었다.

"많이 속상하지?"
"어...아니, 속상하다기보단 답답해. 답답해 죽겠어."
"그래, 나도 이렇게 맘이 무거운데 넌 오죽하겠냐. 연희 때문에 니가 술 먹을 일은 더 이상 없었음 했는데..."
"누가 아니래. 나도 나 사느라 꽤 힘든 사람인데 말야. 졸업해야지, 취직해야지, 남자친구 대학 보내야지...그치만 뭔 짓이든 내가 힘들어서 쫌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할 만하지. 근데 이건 그게 아니니까, 진짜 답답해 미친다."
"그래. 솔직히 이제 더 이상은 아무리 친구라도 제삼자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단계가 아닌 것 같아. 그러니까 소용없는 걱정 그만하고, 일단 좀 지켜보자. 응?"

그러나 계속해서 엎어진 자세로 아무 대답 없는 잔디를 혁진은 쿡쿡 찔렀다.

"뭐라고 대답 좀 해 봐. 화났어?"
"아니, 아니..."

잔디는 침대에 붙인 뺨의 방향을 바꿔 그를 올려다보았다.

"난 다만 이 사태가 너무 이해가 안 될 뿐이야. 어떻게 나도 아니고, 연희같이 착하기만 한 애의 인생에 이런 엿같은 일만 생길 수 있느냔 말야. 정말로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냐구. 이제 막 생길랑말랑했던 믿음이 다 무너지고 있으니 뭔가 나에게 도움이 될 말씀이 있다면 해 달라구, 전 목사. 주님의 입장에선 이 상황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실지."
"야, 제발. 난 목사가 아냐. 니가 보기엔 내 믿음이 꽤나 높은 수준일지 모르지만, 목사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고."
"글쎄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그동안 내가 만났던 남자 중에 신학생이 둘이나 있었다는 거 아니? 그것들도 지금쯤은 어디 가 목사질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

혁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잔디의 말버릇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선 그 정도 가시에 상처받을 일은 없지만, 어떻게 지금 그녀의 감정 상태를 악화시키지 않고 잘 넘길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처럼 슬쩍 피해가기보다는 우직하게 바로 받았다.

"원래 의인의 고난에 대한 문제는 성경에서도 제일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야. 하지만 우선 짚고 넘어갈 건 어떤 사람이 선한 사람인지, 어떤 일이 진짜 고난인지, 세상적인 기준하고 성경적인 기준하고는 좀 다르다는 거야."
"...그래서 니가 보기엔 성경적인 기준에 따르면 연희가 별로 착한 애가 아닐 수도 있고, 지금 걔가 당한 일이 딱히 고난이 아닐 수도 있단 얘기야?"
"그렇다기보다는...연희가 당장 어렵게 된 건 사실이지만, 이걸 완전 비극이라고 결론내릴 때는 아직 아니잖아? 지금까지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새옹지마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잖아."

잔디는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럴 일은 없어. 어쨌든 걔네 둘은 이걸로 끝장이야. 그 망할 새끼가 이제 와 정신 차렸다고 무슨 수를 쓴대도 연희 마음은 절대 돌이킬 수 없어."
"어떻게 그렇게 단정해?"
"걔가 정말 눈꼽만치라도 다시 잘해볼 생각이 있었다면, 절대 지금 같은 선택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분명해. 내가 알아. 내가 걜 알거든."
"그래, 그렇다 쳐도 뭐 그렇게 세상 끝난 것처럼 말할 건 없잖아. 그만큼 단호하게 선택했으면 그만큼 정리도 빨리 할 수 있겠지. 나도 태경이 형 좋아했고 둘이 꼭 잘 됐으면 했지만, 솔직히 우리 나이에 실연당했다고 인생 쫑나는 건 아니잖아. 물론 둘이는 그냥 그렇게 사귄 사이는 아니긴 하지만...그래도 진짜 이혼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다 극복하고 잘 살 수 있는데, 넌 너무 안 좋게만 생각하는 거 아냐? 걱정도 지나치면 좋은 게 아니라구."
"아, 답답해! 몰라, 넌 몰라. 알았어, 그만하자. 우는 소리 더 안 낼 테니 넌 공부나 계속해."
"야, 이 마당에 공부가 문제냐?"
"그럼 뭐? 걱정해 봤자 소용 없다면서!"
"소용은 없지만 그래도 친구니까 걱정되는 게 당연하지. 나도 같이 걱정해주고 싶어. 그치만 너무 오바하는 건 좋지 않다 이거지."
"글쎄 모르는 니가 보기엔 오바 같겠지만 그게 아니라니까?! 나 안그래도 심난한데 이딴 거 갖고 너랑 입씨름하기 싫다. 위로해 준답시고 염장이나 지르지 말고, 그냥 입 다물고 공부나 해."
"알았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바라고 해서 미안해. 근데 난 진짜 니가 왜 그렇게까지 절망적으로 생각하는지 이해가 잘 안 가거든. 설명해주면 안 돼?"
"아, 귀찮아! 더 이상 말 시키지 마."
"귀찮아도 쪼곰만 참고 설명해주면 내가 잘 들을 텐데. 그리고 근심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좋은 남친이 될 텐데..."

잔디는 그제야 몸을 뒤집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해가 안 돼? 걔가 제 발로 그 집에 다시 기어들어갔다는 의미가 뭐겠어. 당장 거기 안 들어가면 얼어죽을 상황도 아닌데. 제 인생 쫑났다고 스스로 선언한 거나 마찬가지야. 남들이 극복할 수 있네 어쩌네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중요한 거지. 솔직히 말해서 난 걔가 지금 자살을 한대도 놀라지 않을 거야."

혁진은 흠칫했다.

"야아, 자살이라니.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그 집에 도로 들어간 것 자체가 이미 자살이나 다름없는 짓이라니까. 제 발로 지옥 들어가는 게 자살 아니면 뭐겠어? 자살하면 지옥 가는 거라며? 니들도 그러잖아."
"그래도 진짜 자살하는 거랑 그거랑 어떻게 같냐? 너 아무래도 진짜 좀 오바하는 것 같어. 연희 입장에선 정말 마음 굳게 먹고 새출발하려는 생각으로 그런 선택을 한 걸 수도 있잖아. 어떻게 생각하면 그 집에 도로 들어가는 건 걔의 권리이기도 하니까 말야."
"그렇게 희망찬 선택이면 왜 며칠째 연락도 안 받고 이렇게 사람 불안하게 만드는데?"
"글쎄, 혼자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할 수도 있겠지. 어쨌든 그 결정에 대해선 연희가 먼저 너한테 알려 줬잖아. 그런 거 보면 니 말대로 걔가 진짜 지옥에 갈 작정이라 해도 최소한 너한테 아무 말 없이 가진 않을 것 같으니까, 너무 앞서서 걱정하지 좀 마. 내가 무조건 다 좋게 생각하는 버릇 있는 건 사실이지만, 너도 뭐든지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는 버릇 있는 거 알지?"

그 말에 잔디는 비로소 조금 진정을 찾고 일어나 앉았지만,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치만 어쩐지 느낌이 안 좋아."
"네 느낌이란 게 언제 좋은 적 있었냐? 넌 그 사람들 처음부터 불안해 했어, 생각 안 나? 그래도 그게 연희 선택이었어. 처음에 태경이 형 따라서 집 뛰쳐나왔던 게 걔 선택이었듯이, 이번에 태경이 형 포기하고 도로 들어간 것도 걔 선택일 수 있다구. 네 기준에선 미친 짓 같이 보이더라도 섣불리 판단하진 마. 어차피 니가 대신 살아줄 수는 없는 인생이잖아."
"그 말이 맞긴 한데...."

잔디는 엉망으로 흩어진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모르겠어. 선택이라고 하니까 할 말이 없어져. 그렇담 너는 진짜 자살도 결국은 개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니까 그 책임을 지고 구원받지 못한다는 결론을 그렇게 쉽게 내릴 수 있는 거겠지."
"왜 또 거기까지 가고 그래. 자살자의 구원 문제라니, 그런 무지하게 복잡하고 민감한 교리 문제에 대해서 난 절대 결론내린 적 없다."
"알았어, 내가 너무 비약했다. 하지만 네가 선택이란 말을 너무 쉽게 하니까 그래. 정말 어쩔 수가 없어서, 다른 선택지가 하나도 안 남아서, 괴롭고 불안해서 제정신 아닌 김에...한 마디로 등 뒤에선 불길 치솟고 눈앞엔 천길 낭떠러지인 상황에서 불에 타 죽기보단 떨어져 죽기를 선택했다고 해서, 그걸 과연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밖에서 보는 사람한텐 그때 그 위기를 벗어날 길이 별로 어렵지 않게 보일 수도 있어. 하지만 그 순간 너무 절망하고 겁에 질려서 미처 그걸 못 보고 뛰어내린 사람한테 그걸 실수였다고 할 수 있을까?
너무 극단적인 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진짜 자살까지 가는 사람들은 마지막엔 다 이런 상황이었다고 봐야 돼. 사람이 살고 싶은 본능이 얼마나 강한데, 이 정도까지 몰리지 않고는 스스로 뛰어내리겠단 마음 먹지 못해. 그걸 어떻게 그 사람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냔 말야. 모든 자살은 사실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는 타살일 뿐이야. 무슨 대단한 신념을 가지고 한 자살폭탄테러나 되면 모를까. 그것도 세뇌당해서 그런 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혁진은 한동안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가 말했다.

"거기까진 미처 생각 못 해봤어."
"그렇겠지. 넌 자살 따윈 평생 꿈조차 안 꿔 봤을 테니."
"맞아. 그럼 넌 꿈이라도 꿔 본 적은 있는 거야?"

잔디는 순간 좀 망설이는 기색이었나 이내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몇 번은. 근데 말그대로 그냥 꿈 꿔 본 거야. 한 번이라도 시도했다거나 정말 그래볼려고 맘 먹은 적도 없었어. 늘 가출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못 한 것처럼...그냥 탈출하고 싶은 여러가지 공상 중 하나일 뿐이었지. 하지만 아는 사람이 자살한 적은 몇 번 있었거든."
"허억, 정말?! 누구?"
"친구도 있고, 친척도 있고...넌 친구들 중에 자살한 애 없냐?"
"아니, 글쎄...나랑 직접 아는 사람들 중엔 없었는데. 건너 건너서 들은 사람은 있어도."
"그럼 넌 운 좋은 거고. 우리 나이 중에 웬만한 사람은 자살한 친구나 선후배 하나쯤은 다 있을 걸? 요새 워낙 자살이 흔하니까. 20대 사망 원인 중에 교통사고 담으로 두 번째라더라."
"그렇구나, 몰랐어. 그런 게 정말 남 얘기가 아니구나. 니가 왜 그렇게 걱정하는지도 이해 간다. 미안해. 뭣도 모름서 눈치 없는 소리해서..."
"아니야. 솔직히 그런 일이야 안 겪으면 안 겪을수록 좋은 거지 뭐. 근데 내 주변에 유독 자살한 애들이 많은 편이긴 해. 내가 워낙 상태 안 좋은 애들이랑 많이 어울려 다녀서 그런 걸지 모르지만."
"그래...잔디야."
"응?"
"윤잔디, 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자살 같은 거 하면 안 된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와 표정이 지나치게 심각해서 잔디는 그만 웃음이 났다. 그러나 그 웃음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혁진은 한층 더 깊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냐. 자살한 사람들에 대해선 이러니 저러니 판단하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너만은 정말 안 그랬음 좋겠어. 난 혹시나 살아서 너랑 헤어지게 되더라도 죽어선 꼭 천국에서 다시 만났음 좋겠다고."
"알았어, 걱정 마. 나 지금까지 살기 싫단 생각은 허구헌날 해왔어도 한 번도 자살할 마음 먹은 적은 없다니까. 난 자살이나 할 만큼 그렇게 치열하게 괴로워하면서 사는 사람도 못 돼."
"...요즘에도 허구헌날 살기 싫어?"
"으응? 무슨 소리야. 나 요즘에 살맛 난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잔디는 아직도 걱정이 가시지 않는 표정인 혁진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웃었다.

"너야말로 쓸데없는 걱정 관둬. 난 연희랑은 달라. 앞으로 너랑 헤어지든 무슨 일을 당하든 굳이 인생 포기할 마음까진 안 먹을 거야. 어차피 이놈의 세상에 첨부터 별 기대도 없었는데, 그나마 너 만나서 너 같은 남자도 있긴 있다는 거 확인했으니까 그걸로 됐어. 뭐 세상 사는 재주도 나름 타고났고 하니, 살 데까진 그냥 함 살아 보려구. 혹시 또 아냐? 죽은 담엔 진짜 괜찮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지."

혁진은 그제야 제 칭찬을 알아듣고 쑥스러움 반 흐뭇함 반으로 히죽거리다가 말했다.

"근데 있잖아. 저번에 백승용이 그랬는데, 뭔 얘기하다 나왔는지 암튼...내 성격이 특이해서 지금 이러고 있는 거지, 솔직히 내 상황이 다른 사람 같았음 자살 한 번쯤은 생각했을 상황이래."

그 말에 잔디는 침대에 자빠지며 웃어댔다.

"욕인지 칭찬인지 헷갈려서...그 새끼 말론 칭찬이라는데, 넌 어떻게 생각해?"
"글쎄, 걔 의도는 욕인지 칭찬인지 모르지만 암튼 난 상관 없어. 난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널 좋아하는 거니까."

혁진은 잠시 있다가 잔디가 웃음을 다 그친 후에 진지한 투로 말했다.

"근데 진짜...나도 그 타이밍에 너랑 사귀게 되지 않았더라면, 자살까진 아니라도 꽤 상태 안 좋아졌을지 몰라. 솔직히 말해서 그때 정말 한계였어."
"그럴만 해. 그래서 난 네 상황에 그렇게 웃고 다니는 니가 너무 신기했어. 솔직히 첨엔 그런 척하는 거거나 아님 좀 정상이 아닌 거라고 생각했었어. 근데 아무리 봐도 또 그건 아니더라구."
"응, 진짜 일부러 괜찮은 척 한 건 아니었지만 계속 그 상태였더라면 내가 언제까지 괜찮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어. 그런 찰나에 네가 나타난 거지. 정말 정말 역시 역시, 하나님은 날 버리지 않으신다는 걸 확인했다니까."
"대학 아니면 여자친구를 달라고 했더니 대학 보내줄 여친을 내려주셨다 그 말이지? 근데 사실 내가 진짜 대학을 보내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좀더 있어 봐야 되는 거 아냐?"
"그렇긴 한데, 사실 나 이번에 대학 붙을지 말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
"저기, 야! 인제는 그게 가장 중요할 때가 아닐까?"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내 문제점을 깨달았다는 거야. 왜 그렇게 네 번씩이나 다 떨어질만큼 공부를 못했는지."
"그래? 니가 깨달은 네 문제점이 뭔데, 어디?"
"공부를 열심히 안 했어."

잔디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걸 이제 깨달았단 말야?"
"응, 이게 진짜 중요한 이유였던 줄은...그게, 그동안 니가 시키는대로 공부 좀 열심히 해 보니까, 내 머리가 생각보다 그렇게 바보는 아니더라구."
"그럼 넌 니가 무슨 지적장애인이라도 되는 줄 알았니?"
"사실 처음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몇 번 실패하다 보니까 점점 자신이 없어져서 나 스스로 변명거릴 만들었던 것 같아. 난 머리 자체가 너무 나빠서 안 된다고...그것만이 아냐. 전에 니가 그랬잖아. 내가 맨날 교회 일 하느라 바빠서 공부할 시간 모자란다고 하는 건 현실도피 아니냐고. 그 말 들었을 땐 욱했는데, 솔직히 찔려서 그랬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해 보니까 정말 네 말이 맞는 면이 있어."
"...진심이야?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물론 교회에 봉사 열심히 하면 좋지. 얼만큼 하더라도 자기가 진심 기쁜 마음으로 헌신하는 거라면 문제될 게 없겠지. 하지만 다른 일 제대로 못 하는 거에 대해 핑계거리로 여기는 마음가짐이 쪼금이라도 있다면 그건 아닌 것 같아. 가만 생각해 보니까 솔직히 나한테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았더라고.
내가 전에 너한테 그랬잖아. 내가 교회 다니는 건 하나님하고의 관계니까 시간 낭비라고 생각 안 한다고. 없는 시간 쪼개서 너랑 데이트하는 거랑 똑같다고. 그치만 바꿔 생각해 보면, 내가 너랑 노느라고 나 할 공부 못해서 성적 떨어져 놓고 그 핑계를 너한테 댄다면 얼마나 치사한 거냐? 하나님하고의 관계도 다를 거 없단 생각이 들었어. 내가 좀 빠진다고 교회 일이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결국 나 좋자고 봉사하는 건데, 그걸 다른 일 못하는 핑계로 삼아서야 되겠어. 공부도 그렇고 연애도 그렇고 무조건 시간만 들인다고 장땡이 아닌데.
니가 전엔 사랑을 못 믿으니까 연애도 일부러 열심히 안 한 거였잖아. 나도 똑같애. 공부에 자신이 없으니까 열심히 해도 잘 안 될까봐 지레 겁먹고 열심히 안 한 것 같아. 교회 일에 집착했던 것도 결국엔 다른 일이 불안하니까 그랬던 것 같고. 다 너 덕분에 깨달았어. 그래서 나 인제 정말 잘할 수 있을 거 같은 생각이 들어. 꼭 좋은 대학 들어가고 그게 아니더라도..."

잔디는 그의 얼굴을 한참이나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가 말했다.

"야, 넌 사람이 여기서 더 괜찮아지면 어떡할라구 그러니? 적당히 해라. 지가 지진아인 줄 알구 교회 일에 집착하는 혁진이만 해도 충분히 쓸만했다구."
"어? 어...왜, 그래도 더 괜찮아져야지. 워낙 괜찮은 여자랑 사귀고 있으니깐 말야. 흐흐..."
"어떻게 우리나라같이 썩은 바닥에서 딸도 아니고 아들래미를 이렇게 잘 키우셨지? 너네 엄마아빠 진짜 존경스러워. 나중에 애 낳으면 얼굴에 철판 깔고 꼭 시부모님께 맡겨야겠어."
"그러다 에스더처럼 되면 어떡할라구? 크크크..."
"솔직히 에스더만한 딸만 돼도 괜찮지 뭐. 근데 하긴, 같은 부모 아래서도 참 다르긴 다르다. 그치? 신기해, 어떻게 그렇게 다른지 모르겠어."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같은 형제라도 타고나는 것부터가 워낙 다르니까. 그래서 사람은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라니까."
"그래도 키우는 사람이 주는 영향도 커."
"그건 그래. 내가 전보다 더 괜찮아졌다면 그건 니가 키운 덕이야. 사실 나, 처음 너 만났을 땐 니가 맨날 막 뭐라 그러는 게 좀 충격이었어. 내가 워낙 웃고 다니고 남들한테 싫은 소릴 안 하니깐 남들도 나한테 안 좋은 말을 잘 안 하거든. 에스더 빼곤...근데 스더는 동생이니까 별로 신경을 안 썼는데, 너한테 비슷한 소릴 계속 들으니까 나한테 뭔가 문제가 있긴 하구나 정신이 팍 들더라. 내가 좋아했던 여자애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돌려돌려 말했던 문제들이 뭔지 그때서야 감이 잡히고...그래서 욕먹으면서도 싫지가 않았어. 눈치 안 보고 콕콕 정곡 찝어서 말해주는 니가 고마웠어. 물론 말이 좀 심하다고 느낀 적도 있지만."

잔디는 아까 혁진처럼 민망함과 흐뭇함이 반반 섞인 웃음을 키득키득 웃었다.

"내가 원래 상대가 천사든 악마든 안가리고 막말해. 사람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 한 겹 벗겨내면 다 똑같다고 생각했거든. 그게 너무 거슬려서, 보는 사람들마다 가면을 다 벗겨 버리고 싶어서 그랬어. 대놓고 심한 소리 하는 것만큼 거기에 효과 직빵인 게 없거든.
근데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어. 너 보고 안 거지만 사람에 따라선 정말 가면 안 쓰고 사는 사람도 있더라고. 또 가면 좀 쓰면 어때. 어차피 가면 없이는 못 사는 약한 사람들이라서 그러는 건데. 나라고 남 말할 처지도 아니고. 그냥 아직도 좀 거슬리긴 하지만, 신경 끄고 살려고. 나도 이제 늙었는지 맨날 싸우면서 살기도 귀찮아졌어."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야. 근데 나도 사실 가식적인 애들은 정말 싫어. 불편해. 하지만 가끔은 그런 사람들이 좀 부럽기도 해. 살다 보면 가면이란 게 어느 정도 필요할 때도 있던데, 난 암만 노력해도 절대 안 되니...그렇다고 너처럼 남의 가면 잘 알아보고 뽀개버리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근데 전에도 말했지만, 넌 어쩐지 같이 얘기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가면을 까먹게 되는 특성이 있어. 아무래도 안 되겠다, 전혁진. 너 살 빼지 마라. 배라도 나와 있어야지, 이거 이렇게 괜찮은 물건인지 딴 년들이 눈치채면 절대 안 돼."
"글쎄, 적어도 나 대학 졸업장 받을 때까진 그런 염려 안 해도 될 걸."
"대학 졸업장...그거야말로 가면 중의 가면이지."
"그렇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적어도 대학 졸업장은 인간의 자격이나 마찬가지더라구. 나도 엄마가 왜 그렇게 대학만은 가라고 성화하시는지 전엔 몰랐는데, 나이 들수록 알게 돼."

조금 우울한 표정으로 말하는 혁진을 향해 잔디는 냉정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건 사실이야. 그리고 졸업장 받는 데서 절대 끝나지 않는다. 니가 앞으로 뭘 하든 어떻게 살든, 니가 졸업한 대학 네임이 이력서 맨 앞에 딱 붙어가지고 평생 네 급수 증명해. 돼지고기 출하할 때 등급 찍는 스탬프처럼 말야. 적어도 우리 양로원 들어갈 때까진 그 풍조 바뀔 가망 없어 보이니까, 단단히 각오해두는 게 좋을 거야."
"그래...뭐 억울하다고 해 봐야 현실은 현실이니까. 니가 진짜 부럽다."
"글쎄, 여자의 경우엔 꼭 좋은 점만 있는 것도 아냐. 어쨌든 난 내가 학벌이 괜찮은 편이고 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그러니까 더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거야. 그거야말로 가면에 불과하다고. 스카이 나와서 연봉 일억짜리 직장을 다닌다 해도 개 쓰레기같이 사는 인간들은 얼마든지 널렸어. 잘나간다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절대 거기에 속으면 안 돼. 난 다섯 살 때부터 알고 있었지."
"근데 넌 왜 맨날 학벌 좋은 애들만 골라서 사귀었는데?"

정곡을 찌르는 지적에 잔디는 멈칫했다.

"학벌 뿐이 아니고 너 남자 조건만 따져서 만난다고 유명했잖아. 내가 봐도 그랬고, 그러니까 너랑 아는 동안 내가 감히 너랑 어떻게 해볼 꿈도 못 꾼 게 당연하지. 근데 사실은 다섯 살 때부터 조건에 속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니, 내 머리론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도저히 모르겠다."
"그건 또 좀 다른 문제야. 설명하기 복잡해."

혁진은 더 이상 따지지 않았지만, 잔디는 어쩐지 이대로 얼버무리고 가기엔 자존심이 상하고 찜찜해서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학벌로 가산점은 안 준다 해도 실제 만나는 건 문제가 달라. 네 말대로 억울해도 현실은 현실이니까, 남자들부터가 자기보다 학벌 높은 여잔 부담스러워한단 말야. 겉으론 쿨한 척해도 속으론 배배 꼬여 있다가 결국은 거기서 터지는 경우가 십중팔구야. 내 한두 번 당해본 게 아니라구. 너같이 여자 잘난 거 열등감 없이 인정할 수 있는 남잔 우리나라에서 정말 흔치 않아. 딴 사람들이 못났다고 하고 싶진 않아. 다 그렇게 배우고 자라서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너같은 애가 특이한 인종인 거지.
암튼 너같은 특이종 아닌 담에야, 그런 거 다 맞추고 들어가도 어차피 사람끼리 맞추기란 힘든 일인데 굳이 그런 짐까지 업고 시작할 필요가 뭐 있어? 난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나랑 조건 안 맞는 애들은 아예 후보군에 넣질 않았어."
"무슨 말인지 이해 가."
"그렇기도 하고, 어차피 남자들이 여자 선택하는 기준도 빤하잖아. 반반한 애 옆에 끼고 남들한테 으스대고 싶어하는 거. 그런 애들 만나면서 나라고 뭐 일부러 인격적인 대우 해주고 싶진 않았거든."
"그런 애들은 안 만나면 되지..."
"그렇게 가려서 만날 거면 아무도 못 만나. 조건도 나쁘지 않고 정신 똑바로 박힌 남자들 만나는 게 대한민국 모든 여자들의 소원이거든. 근데 그러기가 말처럼 쉬운 줄 아니? 우리나라 남자들 중엔 정상인만 해도 극소수라구. 그러니 우량품 정도만 돼도 경쟁률이 하늘을 찔러서 몸값이 터무니없이 치솟지. 내가 겉보기엔 나름 잘나가는 애로 보이겠지만 솔직히 여자애들은 이쁘고 조건 좋고 성격까지 좋은 애들도 줄 섰는데, 나 같은 애한테까지 그런 우량품 안 돌아와. 에스더처럼 우아하게 기다리면서 몸값 올리는 플레이는 또 내 성격에 안 맞고. 차라리 너처럼 아예 안 나가는 애였으면 체념하고 천생연분이나 기다리면서 조신하게 지냈을지도 모르지만, 또 쓰레기들이 찔러대기엔 딱 만만한 캐릭터거든, 내가."

혁진은 아랫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너는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게 참 설명을 잘해. 내가 이해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 여자애들하고 얘기할 때 힘든 점이 좀 많았는데..."
"내가 설명을 잘 하는 게 아니라 네가 이해를 잘 하는 거야. 이해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거거든. 물론 머리가 따라주면 좀더 쉽겠지만,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한텐 아무리 열나게 설명해 봤자 아무 소용 없어. 난 이해할 마음 없어 보이는 사람한텐 절대 기운 써가면서 긴 말 하는 성격 아니라구."
"그래, 칭찬 릴레이는 이쯤 해두자. 그건 그렇고, 학벌에 열등감 없는 특이한 인종이라면 태경이 형도 그렇지 않아? 연희랑 잘못된 데 그런 이유 있었던 건 아니지? 맞나?"
"야! 그 개자식 얘긴 꺼내지도 마."

그렇게 쏘아붙여서 혁진이 입을 다문 뒤, 좀 있다가 잔디는 중얼거렸다.

"역시 어려서부터 사랑받고 자라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응?"
"사람이 열등감 없이 안 비딱하게 자랄라믄 어릴 때 정상적인 부모 아래서 사랑 많이 받고 커야 된다구. 그런 애들은 확실히 달라. 얼굴에 그늘이 없고, 자기랑 비교 안하고 남 잘난 걸 인정할 줄 알고, 아무튼 좀 덜 찌질해. 너나 김태경 씨나 그건 확실히 공통점이야."
"그런가?"
"응. 그러고 보면 왕자의 조건은 다른 게 아닌 거 같아. 돈 많고 잘생긴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릴 때 사랑 많이 받고 자라야 왕자가 되고, 공주가 될 수 있는 거지."
"그래...근데 어려서 왕자 공주로 못 자란 사람이라도, 다 커서라도 사랑 많이 받으면 다시 왕자 공주가 될 수 있는 건가?"
"글쎄...딱 잘라서 불가능하달 순 없겠지만, 내 경험상은 아무래도 좀 어렵지 싶더라. 사람이란 게 쉽게 변하는 게 아니라서."
"진짜 그건 그래. 사람 변화시키는 건 사람 힘으론 힘든 것 같아. 그래서 은혜가 필요하다고 하지. 근데 진짜루 기적같이 사람이 변하는 경우도 있긴 있더라. 주변에서 다 포기한 사람이 아무도 생각 못한 계기에 정말 이해도 안 가게, 은혜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게 변하는 그런 일도 있어."
"그래? 니가 봤어?"
"이 나이에 내가 내 눈으로 본 기적이 얼마나 되겠냐? 교회에서 그런 얘길 많이 듣지. 그게 다 간증이니까."
"........"

아무 대꾸 없이 헷갈리는 표정을 하고 있는 잔디를 보며 혁진은 웃었다.

"역시 교회에서 하는 얘긴 별로 믿음이 안 가?"
"으응, 글쎄...꼭 교회라서라기보단...내가 워낙 좀 의심이 많은 성격이잖아. 솔직히 교회 사람들은 뭐든지 다 너무 확신에 차서 얘기하니깐 오히려 믿음이 잘 안 가더라."
"믿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 노력이 필요하지. 그럴려고 나가는 데가 교회잖아. 근데 아무리 보지 않고도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지만, 확실히 자기 눈으로 보거나 겪어야 믿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 같아. 문제는 의심 때문에 보고도 못 믿는 거지."
"내가 그렇단 얘기야?"
"사람 변할 수 있다는 건 누구보다도 똑똑히 봤으면서 왜 못 믿냐? 너나 나나 우리 처음 만났던 때엔 상상도 못할만큼 변했잖아? 그것도 좋은 방향으로."
"그건 사실이지만...솔직히 언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돼. 어차피 너 아니었음 변하지도 못했을 거니까."
"그렇다고 설마, 만의 하나 우리가 헤어진다고 해서 우리 둘이 도로 전이랑 똑같은 상태로 돌아가기야 하겠냐?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너 방금도 말했잖아. 어쨌든 세상에 나 같은 애도 존재한다는 거 알았으니까 그걸로 됐다고. 나도 나 바보 아닌 거 깨달았고."
"그래, 그렇긴 한데...나 연희도 태경 씨 만나서 정말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거든. 내가 알던 애가 맞나 싶을 정도로, 표정도 밝아지고 성격도 느긋해지고...근데 그 관계가 끝나자마자 정말 거짓말같이 도로 원상태로 복귀됐단 말야. 아니, 그보다 더 나빠졌지."
"야, 그거야 당연히...실연당한지 얼마 안 됐잖아. 그때 상태 좋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냐?"
"실연도 실연 나름이지. 그리고 걘 지금 실연당해서 상태가 나쁜 거랑은 차원이 달라. 뭐랄까...진짜 뭔가 사람이 확 변해버린 것 같아. 걔 표현을 빌리자면 마법이 풀렸다고 해야 하나?"

혁진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 말을 곰씹더니 대답했다.

"어차피 마법은 언젠가는 풀려야 되는 거잖아? 진짜 괜찮은 마법이었다면 풀리고 나서도 뭔가 남는 게 있겠지. 신데렐라도 유리구두 한 짝은 건졌잖아. 그래서 왕자랑 다시 만났고...연희네도 그렇게 될 수도 있지. 좀더 기다려보자."

잔디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난 연희가 집 뛰쳐나간 게 끝일 줄 알았는데, 그 말대로람 이제 겨우 무도회가 끝났단 거 아냐? 역시 인생이란 참 지지부진해. 콤팩트한 맛이 없어."
"그야 당연하지. 옛날 얘기랑 같냐?"
"아무튼 지지부진하나마 끝이 좋으면 좋으련만..."
"사실 인생에 끝 같은 게 어디 있냐. 따지자면 죽어야 끝나는 거지. 그러니 끝이 언제 날지도 사람의 힘으론 알 수 없는 거고...그냥 살아 있을 때 열심히 사는 수밖에."

그렇게 말하며 엎드린 채 자신의 몸에 달라붙는 혁진의 얼굴을 잔디는 잠시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그치만 수험생활의 끝이라는 건 확실히 있을 수 있는 거 아닐까?"
"아...그러게."

신음처럼 대꾸하며 혁진은 다시 참고서를 펼쳤다.

 

 

***
가끔은 타이밍이란 게 참 기가 막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몇 년 전 가인의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는 내용을 쓰고 나서
바로 저희 엄마의 암 선고를 들었었는데,
이번엔 잔디와 혁진이가 자살을 주제로 한창 대화를 나눌 때
소중한 분의 자살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솔직히 한 번도 그다지 그분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적이 없는 저인데
왜 이렇게 시간이 갈수록 고통스러운지 모르겠네요.
136편의 남은 분량을 채우기가 너무 힘겨웠습니다.
영결식까지 좀 쉬고 다시 집필을 시작할까 했으나,
그러고 나서도 이 아픔이 쉬이 가라앉을 것 같은 생각이 안 들어서
그냥 어떻게 해서라도 이번 편을 마무리해놓고 좀 홀가분한 마음으로 쉬면서
이 슬픔에 마음껏 취해있고자 무리를 해서 겨우겨우 이번 편을 마무리해 올립니다.
따라서 다음 편은 조금 늦어질 것 같지만 기다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한 인간의 마지막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시대의 불행과
시대의 부조리와 고통을 한 몸에 짊어지려던 만용이 죄였던 인간의 불행을
깊이 깊이 애도합니다.

 

by 깽이 | 2009/05/28 12:55 | 연재소설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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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마녀 at 2009/05/31 01:34
왕자와 공주를 만드는 환경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

이번 주는 작가님도, 저도 한없이 애달프고 비통했던 한 주였지요.
열심히 사는 건 기본이고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 한 주이기도..

작가님! 퐈이야!
Commented by 홀맨 at 2009/06/10 21:12
혁진이와 잔디의 대화를 들으면 늘 많은 생각을 하게 되요. 둘이 생각이 정말 다른데 절충점을 잘 찾아가는 것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너무 그런 커플이 부럽기도 하구요ㅋㅋ
뭐 아무튼 자살행위?를 한 연희의 슬픈 선택의 종점이 궁금해지네요. 너무 슬퍼요, 불쌍한 연희ㅠㅠ

그 분의 자살소식.. 정말 충격적이었죠? 그 죽음을 너무 빨리 잊어버리지말고 계속 우리 사회가 기억해야할텐데 말이죠.. 마지막 말 멋지네요. '시대의 부조리와 고통을 한 몸에 짊어지려던 만용이 죄였던 인간의 불행'이라! 정말 맞는 말이예요. 깽이님은 역시 작가.. 힘내세요! 우리 모두 그 분의 명복과 연희의 행복을 빌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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